끄적끄적

더 사일런싱(The silencing, 2020)리뷰

산으로 가는 예고편 2020. 9. 27. 10:26

 

영화를 보고나면 제목이 이해되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묵직하고 차가운 분위기에 휩싸인채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 누구 탓이다 어떤 이유 때문이다 설명도 없이 그저 묵직하게 전개될뿐이다. 보통의 연쇄살인마 영화처럼 관객이 범인이 누구인지 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왜 저러는지 추리를 해야하는 불친절한 영화다.

 

힐끗 지나가는 등장인물의 작은 행동이 영화 전반에 걸쳐서 불친절한 인물들의 이해못할 행동을 대신 설명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영화를 유심히 본다면 그에 따른 복선의 활용이 꽤나 흥미로운 재미있으면서도 슬픈 영화이다.

 

하지만 역시나 여자 보안관이 왜 발암이 됐는지, 남주는 왜 경찰에 연락하지 않고 외톨이로 범인을 잡으러 돌아다니는지, 건실한 법의학자인 존 분은 왜 그런 식으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보안관까지 포함하여 내 가족을 위해서 법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두가 커다란 트라우마를 가슴에 품고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연쇄살인범을 발견한 레이번 스완슨은 왜 경찰에 연락하지 않고 혼자서 해결하려 했을까?

아마도 그전부터도 올바른 행실의 남편이라 볼 수도 없었겠지만 딸의 오랜 실종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의 관계가 더욱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알콜 중독이었던 그가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영화 초반의 밀렵꾼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나 그의 전처와 전처의 현재 남편인 인디언 자치구의 보안관이 그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주위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혼자 살고 있는 주인공은 사건이 진행되면서 어린 소녀를 구하고 보호하게 되는 과정 속에 조금씩 자신의 다른 이면을 깨달아가고 영화 후반에는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게 된다.

 

보안관인 알리스는 왜 발암 캐릭터가 됐을까?


그녀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어린 남동생을 동네 친한 주민에게 맡기고 혼자서 공부를 하기 위해 시카고로 떠난다. 하지만 그녀가 없는 사이 동생은 입에 담지 못할 아동학대를 당해 정서적으로 피폐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대도시의 생활을 버리고 동생을 보살피기 위해 고향으로 되돌아왔으며 아직 오랜만의 시골 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마을 출신이지만 이제는 도시에서 온 이방인이 되어 마을 사람들과도 갈등이 있다. 또한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다는 피해의식도 상당한 상태이면서 자신이 동생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그가 그런 꼴을 당했다는 트라우마로 깊은 죄책감에 빠져있다.  


그래서 그녀는 동생이 어떤 짓을 하든(마약이든 살인이든) 그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살인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불안한 정신상태인 것이다. 동생에 관한 일이라면 사이코패스가 된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녀는 왜 범인이 아니라 레이번을 쐈나?

그녀는 늘 남동생이 손가락 관절을 꺽으며 소리를 내는 버릇을 싫어했다. 그런데 범인을 제압한 순간 범인이 손가락을 꺽는 행동을 하자 그녀는 범인이 남동생이라고 순간적으로 오인하게 된다. 그래서 레이번을 죽여서라도 그의 입을 막고 남동생을 보호해주려고 것이다.

 


연쇄살인범은 왜 손가락을 꺽었나?

레이번이 신분 미확인 시신을 확인하고 돌아간 다음 시체안치소 앞에서 존 분 박사와 알리스 보안관이 대화하면서 그녀가 1초정도 지나가듯 남동생의 관절 꺽는 버릇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듣고 기억하고 있었다. 

 

소녀들의 목에 상처는 뭔가?

분 박사의 딸이 음주운전자의 뺑소니에 치었을 때 목도 함께 다쳐서 도움 요청도 못하고 서서히 혼자서 외롭게 숲에서 죽어갔었기 때문에 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해주려고 납치한 소녀들의 목을 찢고 성대를 없앤후 다시 꿰매준 것이다. 그리고 상처가 낫고 나면 숲에 풀어주고 사냥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제목이 사일런싱인 이유이기도 하다.

 

왜 범인은 주인공의 딸을 납치했나?

분 박사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은 훌륭한 아버지였고 딸을 정말 소중히 키우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주운전자의 뺑소니로 딸을 잃게 된다. 그런데 그의 주위에 있는 불량한 부모들은 딸을 아무렇게나 소홀하게 키우면서도 딸을 가진 행복을 누리고 있다. 나는 딸을 잃었는데 감히 저런 것들이... 

자격도 없는 것들이 누리는 호사에 가슴 깊은 곳에서 증오가 끓어오른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그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실종된 소녀들의 부모를 보면 하나같이 알콜중독이나 마약 등의 문제가 있다.

전체적으로 영화의 분위기는 묵직하고 암울하다. 최후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딸의 복수나 남동생의 보호같은)을 위해 범법을 저지른다. 레이번은 범인이 짐승 포획용 함정에 떨어져 나무 못에 찔린 상태에서 정말 이렇게 한낱 짐승처럼 죽게 놔둘 거냐고 묻자 네가 짐승이라면 그렇게 고통 속에 죽게 남겨두진 않겠지라고 대답하며 살려주지도 죽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함정의 문을 닫고 자리를 떠난다. 

 

You're going to let me die like some animal? - 이렇게 짐승처럼 죽게 내버려둘건가?

No. I would never leave an animal suffering. - 아니, 짐승이 고통받고 있다면 결코 내버려두고 가진 않겠지

 

범인을 두고 레이번에게 방아쇠를 당긴 앨래스 보안관은 그에 대한 댓가로 레이번의 행위를 방조하고 사람들에게도 함구하게 된다.

 

레이번의 복수가 성공했지만 통괘하기 보다는 뭔가 우울하고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들이 겪는 암울한 상황 속에 레이번이 구한 소녀가 살아남아 레이번의 딸인 그웬 스완슨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습이 유일한 구원의 빛으로 느껴졌다.

 

딸이 살아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해 끝까지 부정하던 딸의 장례식을 치른 레이번이 딸을 잃은 원인이었던 레드윙 스카치 위스키를 들고 강가로 다가가는 뒷모습을 조명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자막 참고>

 

Atlatl 아틀라틀로 표기

 

고대에 만들어진 투창을 위한 투창기의 일종. 아틀아틀이라고도 한다. 어차피 던진다는 것 자체는 차이점이 없었지만 그냥 손으로 던지는 것에 비해 아틀라틀로 던지면 훨씬 더 멀리 날아간다. 생김새는 단순히 좀 휘어지고 갈고리와 손가락 걸개가 양끝에 달린 막대기로, 이 갈고리에 투창을 걸친 뒤, 아틀라틀의 끝부분에 있는 고리에 엄지와 검지를 끼운 후 창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서 던질때는 뿌리듯이 던지면 된다. 그럼 투석기와 같은 원리로 투창이 발사된다.